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온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수압, 그리고 살얼음장 같은 차가움. 우리가 상상하는 심해는 바로 이런 모습일 겁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아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이곳은 생명이 살기에는 너무나 척박해 보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마치 외계 행성을 탐험하듯, 신비로운 심해 생물들은 어떻게 먹이를 구하고 에너지를 얻을까요? 오늘은 빛 한 점 없는 심해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특별한 만찬, 심해 생물들의 먹이 공급원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바다 위에서 내려오는 ‘바다눈’부터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열수분출공’, 그리고 거대한 ‘고래 사체’까지, 심해 생존의 비밀을 파헤쳐 봅시다!
1.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눈꽃, ‘바다눈 (Marine Snow)’
“웬 눈이 바다에?” 하고 고개를 갸웃하실 수도 있겠지만, ‘바다눈(마린 스노우)’은 심해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바다눈은 바다 표층에서부터 심해 바닥까지 천천히 떨어지는 다양한 유기물 입자들을 말하는데요. 마치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듯 보여 이런 예쁜 이름이 붙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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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눈, 너는 누구냐?
바다눈의 정체는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죽은 식물플랑크톤이나 동물플랑크톤, 동물플랑크톤이 먹고 남긴 찌꺼기나 배설물, 아주 작은 생물들의 사체 조각, 끈적끈적한 점액질, 그리고 심지어 육지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미세한 먼지나 모래 알갱이까지 포함될 수 있죠. 이 작은 입자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점점 크기가 커지고, 무게 때문에 서서히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어떤 바다눈은 끈적한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마치 길게 늘어진 커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심해 생태계의 든든한 밥줄!
햇빛이 닿지 않아 식물이 살 수 없는 심해에서, 이 바다눈은 그야말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탄소, 질소, 인과 같이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영양분이 풍부하게 들어있기 때문이죠. 심해 바닥에 사는 많은 생물들은 이 바다눈을 직접 주워 먹거나(퇴적물 섭식자), 물속을 떠다니는 바다눈 입자를 걸러서(필터 섭식자) 배를 채웁니다. 마치 우리가 하늘에서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심해 생물들에게 바다눈은 소중한 선물인 셈이죠. -
바다눈을 먹고사는 친구들
심해 새우나 작은 게와 같은 갑각류, 해삼, 갯지렁이 종류인 다모류, 그리고 일부 심해 어류들은 바닥에 쌓인 바다눈을 냠냠 맛있게 먹습니다. 해면동물이나 일부 조개류는 몸으로 물을 통과시키면서 바다눈 입자를 걸러 먹는 필터 섭식의 달인들이죠. 심지어 바다눈에 붙어서 번식하는 박테리아를 먹이로 삼는 아주 작은 생물들도 있답니다. -
지구 환경 지킴이, 바다눈?
놀랍게도 바다눈은 지구 온난화를 늦추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로 ‘생물학적 탄소 펌프’ 역할인데요. 바다 표층의 식물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데, 이들이 죽어서 바다눈의 일부가 되어 심해로 가라앉으면 탄소가 바다 깊은 곳에 저장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덕분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죠. 정말 작지만 큰일을 하는 친구들이죠?
2. 뜨거운 생명의 오아시스, ‘열수분출공 (Hydrothermal Vents)’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을 탐험해 볼까요? 바로 해저 화산 활동 지역 근처에서 발견되는 ‘열수분출공’입니다. 이곳은 마치 지구 내부의 뜨거운 심장이 만들어낸 해저 온천과 같은 곳인데요, 주변 바닷물보다 훨씬 뜨거운 물이 지각의 틈을 통해 검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이 뜨거운 물에는 황화수소, 메탄, 철, 망간 같은 독특한 화학물질이 아주 많이 녹아있죠. 빛 한 점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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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없이도 OK! 화학합성 생태계
놀랍게도 열수분출공 주변에는 아주 독특하고 밀도 높은 생물 군집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곳 생태계의 비밀은 바로 화학합성 박테리아에 있습니다. 이 특별한 박테리아들은 햇빛 대신 열수분출공에서 나오는 황화수소나 메탄 같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로 이산화탄소 같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만들어내죠. 마치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이들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화학합성’을 하는 것입니다. 지구 내부의 화학 에너지가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셈입니다! -
너 없인 못 살아! 환상의 공생 관계
많은 열수분출공 생물들은 이 화학합성 박테리아와 아주 특별한 공생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대한 관벌레(Riftia pachyptila)인데요, 이 관벌레는 입이나 소화기관이 없는 대신 몸속 특별한 기관(영양체)에 화학합성 박테리아를 잔뜩 키웁니다. 박테리아는 안전한 집을 얻고, 관벌레는 박테리아가 만들어내는 영양분을 직접 공급받으니, 그야말로 환상의 짝꿍이죠! 심해 홍합이나 조개류도 아가미 조직에 화학합성 박테리아를 품고 살아갑니다. -
열수분출공 주변의 시끌벅적한 생명들
화학합성 박테리아 자체를 먹거나, 박테리아와 공생하는 생물들을 먹이로 삼는 다양한 동물들이 열수분출공 주변에 모여듭니다. 예를 들어, 열수분출공 새우(Rimicaris exoculata)는 등딱지에 박테리아를 길러서 긁어 먹기도 하고, 열수분출공 게(Bythograea thermydron)는 관벌레나 다른 작은 생물들을 사냥합니다.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오는 굴뚝 벽에 붙어 사는 폼페이벌레(Alvinella pompejana)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동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죠. 이처럼 열수분출공은 빛이 없는 심해에 독자적인 먹이 사슬과 풍요로운 생명의 터전을 제공합니다.
3. 바다의 로또! 거대한 만찬, ‘고래 사체 (Whale Fall)’
만약 거대한 고래가 수명을 다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음식 꾸러미’가 떨어진 것과 같을 텐데요, 이를 ‘고래 낙하(Whale Fall)’라고 부릅니다. 수십 톤에 달하는 고래 사체는 심해저의 특정 지점에 막대한 양의 유기물을 한꺼번에 공급하며, 이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하고 풍부한 생태계를 만들어냅니다. 심해 생물들에게는 그야말로 ‘로또 당첨’과 같은 사건이죠!
고래 사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생물 군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변화하는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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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재빠른 청소부들의 향연 (Mobile-scavenger stage)
고래 사체가 바닥에 막 도착하면, 가장 먼저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바로 먹장어나 잠꾸러기상어 같은 대형 이동성 청소 동물들, 그리고 일부 심해 게 종류입니다. 이들은 고래의 부드러운 살과 지방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며 포식을 즐깁니다. 이 단계는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2년 정도 지속됩니다. -
2단계: 작은 미식가들의 풍요로운 잔치 (Enrichment-opportunist stage)
대형 청소부들이 떠나고 나면, 이제 작은 생물들의 차례입니다. 고래 사체 주변의 퇴적물은 유기물로 풍부해지고, 아직 남아있는 살점이나 뼈에는 다모류(갯지렁이 친구들), 작은 새우나 게 같은 갑각류, 조개류 같은 연체동물들이 엄청나게 몰려와 번성합니다. 이들은 남은 유기물을 먹거나 사체 표면에 자라는 박테리아를 섭취하며 풍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마치 큰 잔치가 끝난 후 남은 음식을 즐기는 작은 손님들 같죠? 이 단계 역시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이어집니다. -
3단계: 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 (Sulphophilic stage)
시간이 흘러 살과 지방이 거의 다 사라지고 앙상한 뼈만 남게 되면, 이제부터가 진짜 신기한 단계입니다. 고래 뼈 속에는 여전히 많은 양의 지질(기름 성분)이 남아있는데요, 산소가 없는 환경을 좋아하는 혐기성 박테리아가 이 지질을 분해하면서 황화수소를 만들어냅니다. 어? 황화수소?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맞습니다! 바로 열수분출공 생태계의 에너지원이었죠.
이 황화수소를 이용해 화학합성 박테리아가 다시 번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생물 군집이 형성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아주 특별한 생물이 바로 오세닥스(Osedax)라고 불리는 ‘뼈 먹는 벌레’ 또는 ‘좀비 벌레’입니다. 이 벌레는 마치 식물처럼 뿌리 같은 구조를 고래 뼈에 박고, 뼈 속의 유기물을 직접 분해하고 흡수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습니다. 소화기관도 없이 박테리아와의 공생을 통해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황화합성 단계는 수십 년, 심지어는 100년까지도 지속될 수 있으며, 고래 뼈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심해 생물들의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고래 사체는 이처럼 단계별로 다양한 생물들에게 먹이와 서식지를 제공하며, 심해 생물 다양성을 높이고 멀리 떨어진 심해 생태계 간의 유전적 교류를 돕는 ‘징검다리’ 역할도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4. 육지에서 온 깜짝 선물, ‘목재 낙하 (Wood Fall)’
바다눈, 열수분출공, 고래 사체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육지에서 떠내려온 나무 또한 심해 생물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이나 홍수를 통해 바다로 흘러 들어간 통나무나 나뭇가지 등이 심해저로 가라앉는 현상을 ‘목재 낙하(Wood Fall)’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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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먹이가 된다고?
심해는 기본적으로 유기물이 매우 부족한 환경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라앉은 나무는 드물지만 중요한 유기물 공급원이자 서식처가 됩니다. 나무는 주로 셀룰로오스와 리그닌이라는 단단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분해하기 쉽지 않지만, 일부 심해 생물들은 이 나무를 갉아 먹거나 나무 표면에 자라는 박테리아, 곰팡이 등을 먹이로 삼습니다. -
나무를 사랑한 심해 생물들
나무를 갉아 먹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심해 조개류(예: Xylophagaidae 과)나 일부 갑각류들이 목재 낙하 주변에서 발견됩니다. 또한, 나무는 단단한 기질을 제공하기 때문에 고착 생활을 하는 해면동물이나 말미잘 같은 생물들에게 좋은 부착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고래 사체만큼 규모가 크거나 생물 군집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목재 낙하는 심해 생태계의 다양성을 더하는 작지만 소중한 ‘섬’ 역할을 합니다.
심해, 그 끝없는 생명의 신비
오늘 우리는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심해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려오는 ‘바다눈’은 심해 전반에 걸쳐 기본적인 영양을 공급하고, 지구 내부의 에너지로 뜨겁게 타오르는 ‘열수분출공’은 화학합성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생명의 꽃을 피워냅니다. 거대한 ‘고래 사체’는 수십 년간 이어지는 풍요로운 만찬을 제공하며 다양한 생물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가끔씩 떨어지는 ‘목재’ 또한 귀한 자원이 됩니다.
이처럼 심해 생물들은 극한의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적응하고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심해. 그곳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더 많은 생명의 비밀과 경이로움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될 심해 탐사를 통해 또 어떤 놀라운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지 않으신가요? 심해 생태계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그들의 놀라운 생존 이야기에 계속해서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